- 삼란공신 모하당 김충선 장군(1571-1642)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의 시조이다. 자(字)는 선지(善之), 호(號)는 모하당 (慕夏堂), 본관(本貫)은 김해(金海)이다.
- 선조 25년(1592) 임진전쟁 발발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右先鋒將)으로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동래부(東萊府) 하마정(下馬亭)부근에 진(陳)을 치고 조선을 살펴보니 난리로 경황이 없는데도 예절과 겸양의 기풍이 있고 의관(衣冠) 문물이 정연(整然)함을 보시고는 금번에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예의문물이 반듯한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명분이 없고 가까운 이웃나라에 화만 끼칠 뿐이라는 것을 느끼고 동년 4월 15일에 효유서(曉諭書)를 게방(揭榜), 동년 4월 20일에는 강화서(講和書)를 작성하여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보내고 이끌던 군사와 함께 조선에 귀화하였다.
- 이후 선생은 반기(反旗)를 높이 들고 남해지역의 각처 전장에서 여러번 공을 세우니 체찰사(體察使)가 상세한 내용을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선생을 불러 어전무술시예(御前武術試藝)를 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벼슬을 내리셨다.(임진(壬辰)년 12월)
- 선조 26년(1953) 울산군수 김태노(金太虛)와 서인충(徐仁忠) 군사와 합세하여 경주 이견대(利見臺)와 중양봉길리(中洋鳳吉里) 적(敵)을 대파하니 도원수 권율(權慄)과 어사 한준겸의 장계로 선생(일본성명 사야가(沙也可))에게 성과 이름을 내리시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벼슬까지 내리시었다.(계사(癸巳)년 4월)
- 선조 27년(1594) 兵使 김응서(金應瑞)와 연계하여 진(陳)을 치고 항시 조선병기의 미약함을 상소하고 수하 김계수(金繼守)와 김계충(金繼忠)을 각 진영에 보내 조총과 화약제조법을 가르치고 단련시켰으며 또한 훈련청을 강화하여 정예군대화로 적과 대항하니 전세가 호전된 것도 선생의 공이 크다고 하였다
- 선조 36년(1603) 만주족이 해마다 국경을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자원하여 10여년을 변방을 지키고 돌아오니 광해군(光海君)은 후원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내리시고 어필(御筆)로 자원임방기심가가(“自願仍防 其心可嘉”-자원하여 계속 변방을 지켰으니 그 마음 가상하다)의 8字를 하사하셨다.
-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亂)에는 이괄의 부장 서아지(副將 徐牙之)를 잡으니 조정에서 사패지(賜牌地)를 내려 그 공(功)을 치하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수어청에 헌납하여 둔전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 인조 6년(1628) 우록리에 사시면서 가정에 대한 훈계로서 가훈(家訓)과 자손들과 동리인에 대한 조약인 향약(鄕約)을 지어 후손과 주민들간 상부상조와 화합을 이루도록 하였다.
- 인조 20년(1642) 선생은 나이 72세로 시골집에서 병으로 별세하셨다. - 정조 18년(1794) 녹동사(鹿洞祠)를 건립하여 춘향(春享) 제향(祭享)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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